69 : sixty nine

무라카미 류의 ’69’은 1969년을 뜻한다.(그의 성향으로 볼때 그런 뜻만을 염두해 두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자전적 소설로써 류가 고등학교 시절에 어떠 어떠한 생활을 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으며, 그의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다르게 유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켄’은 친구들한테는 ‘대의’를 위해서라고 당당하게 거짓말하며 실은 천사같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 학교를 바리케이트 봉쇄 하는 그런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peace, peace’를 외쳐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왠 닭대가리같은 소리냐 할 것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덜 여물었다고도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 그런 치기어린 행동을 한다고 해도 지금 내 나이(?)쯤 되서 그런 행동을 상상해보면 ‘그럴수도 있지’ 할지도 모른다. 그 틀에 박힌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다 꿈꿔 보았을 그런 행동들 아닌가?
나도 그런 학창 시절이 있었다. 선생이란 작자들은 대부분 학생을 점수로 평가하고 우리들이 처한 불리한 위치를 이용해 학생들을 때리고 겁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그 시절 제대로 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순한 양처럼 살았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원통한 일이지만 이런 책이라도 보며 위안을 삼는것도 좋다.

류는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를 억압하는 사람들을 엿먹이는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것이다.

이 책은 류의 말대로 최대한 즐겁게 읽어주자. 꼭 의미를 찾아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주인공인 켄은 충분히 심각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겉으로는 꽤나 유쾌해 보이지 않는가?

인상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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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내가 잠깐 말하지 않았니? 알지?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응, 말한 적 있어, 있어!”
“음악은 뭘로 한다고 헀더라?”
“메시안 아냐?”
“그래, 그래, 맞아.”
이 당시부터 나는 타인을 속이는 기술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할 때, 상대가 모르는 세계를 일부러 내세우는 것이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다. 문학에 강한 녀석에게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야기를, 록에 강한 녀석에게는 메시안 이야기를, 클래식에 강한 녀석에게는 로이 리케텐슈타인 이야기를, 팝 아트에 강한 녀석에게는 장 주네 이야기를 적당히 얼버무리면 지방도시에서는 절대로 논쟁에서 지지 않는다.

형사의 방문을 받아본 사람은 인생의 한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즉, 불행이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으로부터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이다. 행복은 그 반대이다. 행복은 베란다에 있는 작고 예쁜 꽃이다. 또는 한 쌍의 카나리아이다. 눈앞에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후쿠는 드럼을 치라고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후쿠의 영어가사는 엉터리였다. 가사를 잊어 버리면, 돈츄노(don’t you know)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이 시대는 돈츄노만 외쳐대면 누구라도 록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우뚝 멈추어 서서, 카메라를 눈에다 대고, ‘좋아’ , 라고 말하고 셔터를 누른 다음, ‘해’. 를 덧붙이면서 다시 셔터를 눌렀다. 부끄럽다는 듯이 레이디 제인은 미소지었지만, 그 완벽한 미소는 석양에 지워져, 필름에는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잔혹한 일이 있다는 것을 난 알아. 베트남이나 유대인 수용소라든지, 그렇지만 난 일부러 그런 영화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왜,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만 할까?”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이다.
나는 고교 시절에 나에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옛날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 소리를 들려 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결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우선 이 책은 19세미만 구독불가 딱지가 붙어있다.
이 책의 문자 하나하나는 무척 자극적이지만 묘한 상상을 끌어내는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책을 읽는 내내 왠지 모를 불쾌한 느낌과 끝없는 상실감만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 그 중독으로 인해 끝을 알 수 없는 우물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것인지 보게 된다.

류는 1인칭시점으로 자기주변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끝없는 마약복용, 혼음파티등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무척이나 충격적이지만 그는 객관적으로, 아니 그것보다는 멍한 상태로
주변의 일들을 담담하게 말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물을 그저 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
어딘가 출구가 있길 바라는 나의 바램과는 달리 류는 지하철에서 부녀자를 폭행하고 친구들이 사람을 때리고 있을때 망을 보기도 하며
릴리를 목졸라 죽이려 하는등 끊임없이 무너져 가는 것이다.
그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상황을 파악해야만 소설의 의도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책의 해설에 나와 있는데 말하자면 류가 말하는 검은새란 미국을 말하며, 검은새에 의해 이질적인 문화를 주입당하게 된 일본의 6-70년대의 상황을 이 소설은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전후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50년 이후 급격한 발전을 이룩할 때 많은 가치관의 혼란이 존재했다고 한다.
당연하다. 이전의 가치관과 취사선택 없이 반강제적으로 어떤 가치관이 급격히 충돌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란을 겪는것이다.
지금의 중국을 보아도 어느정도는 알 수 있다.
중국의 이전의 공산사회를 벗어나 개인의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사회로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물질’이라는 가치는 이전의 어느것보다도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안’으로써의 well being보다는 ‘겉’으로써의 ‘well being’을 추구하게 된다.
어제 VJ특공대란 프로에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겉을 중요시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난 느꼈다. ‘중국도 이제 성형미인이든 뭐든 상관없이 일단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것만을 추구하는 나라로 변해가는 거구나…’

이 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들이란 마약,혼음이지만 그건 그들이 망가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개개인의 ‘가치관’이 망가져가는 수단이거나 혹은 ‘가치관’의 붕괴로 일어나는 결과일뿐이다.

류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빛을 가진 유리조각과 같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마음속으로 조용히 ‘나 다시 돌아갈래’ 를 외치고 있는것이다.
맑게 된다는 것을 꿈꾼다는 것… 어느 누구나 바라는 것이고, 그것과 더욱 멀어져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 간절히 바라는 상황일 것이다.

사람이라는 곳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