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이야기1, 2

Caesar IV ©Tilted Mill

로마인 이야기가 한국에서 한참 인기를 끌던 시절에는 의식적으로 안 봤다. 베스트셀러에는 왠지 모를 반감이 있다. 남들이 다 하는건 안하겠다는(그러면서도 결국 다 하지만) 그런 알량한 자존심때문이겠지. 아무튼 결국은 봤다. 아니 보고 있다. 다빈치코드도 남들 다 보고 있을때 안보고 버티다가 나중에 사진까지 포함된 컴플리트 에디션 비슷한 게 나왔을때 봤던 기억이 난다(이런 경우는 늦게 보는게 좋다. 의도야 어쨌든).
‘안 보는 척 해도 결국은 다 볼껀데 왜 안보고 있었을까’라는 후회가 들 정도로 ‘로마인이야기’는 잘 쓰여진 책이다. 솔직히 커버 안쪽 사진의 평범하게 생긴 아줌마-마치 옆집 아줌마같이 생긴-가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솜씨에는 놀랐다. 특히 한니발전쟁에서는 마치 내가 전장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라면 영화 이야기라던가 에세이 좀 깔짝 보다가 때려쳤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이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전부 다 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녀의 책도 참 많구나. 거기다 두껍기까지 하고.

1권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단지 믿는 신의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그리고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로마가 융성한 원인은 그들의 윤리나 정신보다 법과 제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로마는 왕정시대에도 왕을 민회에서 선출했으며, 공화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원로원을 비롯한 각급 공직은 선거제도를 통해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점령부족에 대해서는 시민권을 개방하고 그 대표자를 원로원에 흡수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에 성공했다. 또한 종교생활에 있어서도 그들은 다신교 체제를 택함으로써, 신들을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을 수호하는 아버지같은 존재로 받아들였다.


로마 건국은 BC753 이며, 이미 기원전에 어이없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젠장젠장젠장, 지중해쪽엔 이미 기원전에 변호사가 있고, 공화정치가 있고, 뛰어난 건축술이 있었으니 이건 정말 불공평해. 시드마이어의 ‘문명’에서도 민주정까지 가다보면 이미 기원후는 한참 지나있는데 말이다.

2권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대해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

알렉산드로스는 제자의 재능을 시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의 행운이기도 했지만, 한니발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로마인의 전통은 패자까지도 관용하는데 있소. 자마에서 패배한 한니발을 다룬 방식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소. 패자를 절멸시키는 것은 로마인의 방식이 아니오. 무장한 적에 대해서는 무장한 마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만, 무장을 푼 자에게는 이쪽도 무장을 푼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 로마인의 방식이었소. 따라서 이번에도 그 방식을 따르는 것이 로마인한테서 병권을 위임받은 나의 임무요.”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을 보며 은하영웅전설의 양웬리와 라인하르트의 관계가 생각났다. 라이벌 관계는 언제나 흥미롭다. 로마쪽은 그것이 실제 사건이기에 더 흥미롭고.

5월 – 나쓰메소세키의 마음, 행인, 그리고 유시민의 유럽 이야기

푸른 5월에 나는 도대체 뭘 한건지 모르겠다. 이제 6월이고 2주 후면 방학이다.
지금 나라는 그야말로 난리다. 쇠고기 문제가 이제는 삶의 문제로 옮겨갔다. 한달 내내 국민은 고시철회를 외쳤고 2MB는 모른 체 했다. 지금은 시위의 본질이 흐려졌느니 따위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본다. 애들 교육 할때도 3-4번은 말로 하고 그래도 안되면 결국 때려야 된다. 하물며 2MB는 애도 아니다. 어쨌든 제발 그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그가 본질적으로 변하리라고는 기대도 안하지만).

5월에는 책을 3권 봤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가 생각났다. 그의 말을 조금 바꾸자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삶이 이렇게 쉽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시위하고 있는데 책이나 읽고 있는 것은 한심한 짓이다.

마음(나쓰메소세키) –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증오하는 마음… 그것밖에는 없다. 자살은 어찌보면 이 모든 마음이 작용했을 때 일어난다.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그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 그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낳은 증오의 마음, 증오했던 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낳은 죄의식의 마음… 앞으로 이 소설을 자주 읽게 될 것 같다.


굴곡없이 단조로운 생활을 해온 나의 내면에는 늘 그와같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알아주게.내처의 눈에 답답하게만 보였던 그 부분이 날 속에서 몇천배,몇만배의 힘으로 짓눌렀는지 모르네.내가 이 감옥 안에 더이상 틀어박혀 있을 수 없게 됐을 때,그리고 어찌해도 그 감옥을 깨부술 수 없을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지. 자네는 어째서 그것만이 길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은 모든 면에서 나의 활동을 차단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길 만큼은 갈 수 있도록 날 놓아주었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나? 그대로 죽은 듯이 살아가겠다면 그렇게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자 한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한가지 길 밖에 없었단 말일세.


행인(나쓰메소세키) – 인간에게 마음밖에는 없다면 그 마음을 소통할때 인간 삶의 부조리가 생겨난다. 인간 사이의 완전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타인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자신의 마음을 입 밖에 내는 순간부터 왜곡이 일어나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어떤 두려움이 생겨난다. 자신을 완전히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두려움, 자신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두려움. 그래서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이런 불완전을 인정할 수 없는 지로의 형 이치로는 가족과의 소통을 접지만 소설의 끝부분까지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처음엔 그의 정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후반엔 어느정도 공감했다고 해야할까…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에 왔을때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한 인간은 몇천년 뒤에나 나올것이라고 했다. 이제 소세키가 사망한지 100년이다. 인간 사이의 더 나은 소통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 인력거에서 마차, 마차에서 기차,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 이야기 1 : 영국.프랑스.독일편 – 론리플래닛 유럽판의 추천 서적에 있길래 봤다. 사실 이 책을 고른건 유시민때문이었지만 빌려 놓고 보니 제노포비아 시리즈를 유시민이 번역한 책이다. 어찌 됐든 내용은 좋다. 어차피 여름에 가게 될 여행은 유럽 겉핧기라는 걸 알고 있다. 한나라에서 겨우 3일씩 있으면서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꺼라고는 1%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쩌면 나에게 그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선입견을 줄지도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어찌보면 아는 만큼 선입견에도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성으로라도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은 나는 이 책을 펼쳐들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1%는 이해한 느낌이다. 그러면 된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