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는 지난 관념의 세계와 결별하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양을 쫓는 모험’을 썼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관념의 세계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학생운동 당시 지녔던 이념이다.
그 이념은 어떤 확고한 체계적인 이념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 찬 현실을 한 순간에 폭파하고 싶은 열망에 불과했다고 책의 마지막 부분의 감상 노트에 나와있다.

검은 양복의 남자는 양을 찾아오라고 ‘나’에게 말한다.
이에 ‘나’는 그것의 정확한 실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른 체 그저 찾기 시작한다. 이는 곧 하루키의 학생운동의 시작을 의미하는 듯 하다.

아주 잠시 학생운동을 맛보았던 나는 그것이 비록 이상을 추구한다고는 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잡을 수 없는 이상을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이념을 세우지도 못한 체 그저 대안없는 현실비판에 얼마나 수많은 학생들을 동원하는지도 알고 있다.

양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 뇌에 혈혹을 만든다는것으로 양의 극단성, 즉 학생운동의 극단성을 알 수 있다.
뇌에 혈혹이 생긴 사람이 생존한다는것에 대단한 의문을 갖는다는것은 뇌에 혈혹이 생길 경우 생존가망성은 거의 없다는것을 말하며 이로 인해 곧 그 사람이 양에게 목숨을 맡기고 양에게 끌려다니는 결과를 초래하는것이다.
‘나’는 ‘양’을 쫓는다는것이 얼마나 허무한것인지도 모른체 돌고래호텔을 거쳐 산아래의 목장에 이른다.
거기서 ‘쥐’를 만나는 ‘나’는 ‘쥐’가 양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양’의 실체를 알게 된다.
양이 ‘쥐’의 몸에 들어간 목적은 혼란스런 관념의 왕국을 만들기 위함이다.
‘쥐’는 관념의 왕국보다는 그 자신의 나약함이 좋다고 말한다. 또 ‘나’도 세계가 따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들 그 세계가 좋다고 말한다.
하루키가 ‘1973년의 핀볼’ 다음으로 쓴 ‘양을 쫓는 모험’은 제목에서 느끼듯 약간은 추리 비슷한 면이 없지 않은데 모든것은 마지막에 드러나기에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을 수 없다.

하루키가 말하는 관념이란 무엇인가? 은하영웅전설의 한 구절을 통해 국가와 일부상위계층이 ‘관념’이란 것을 이용해 어떠한 횡포를 부리는 지 어느정도는 알 수 있다.

레베로는 그를 포위한 쇤코프에게 말한다.
“왜 이런 폭거에 나선 건가?”
“외람되지만, 폭거라는 건 당신이 한 일이겠죠. 우리들은 그렇다 쳐도, 양웬리에 대한 대우가 공명정대했다고 가슴을 펴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말하기 어렵지만 국가의 존망은 개인의 권리 차원에서 말할 수 없어.”
“개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게 민주국가죠. 하다 못 해 양 웬리가 당신들을 위해 공헌해 온 과거를 보시오.”
“내 가슴은 아프지 않은 줄 아나? 도의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알지만 난 국가의 생존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군요. 당신은 양심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양심적인 정치가인 모양이군요.”
신랄한 웃음이 쇤코프의 단정한 얼굴을 따라 비스듬히 흘러 내렸다.
“그러나 결국 당신들 권력자는 언제나 잘라내는 쪽에 서지요. 팔다리를 자르는 일은 분명 아픈 일일 겁니다. 그렇지만 잘려나가는 팔다리쪽에서 보면
결국 어떤 눈물이든 자기도취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라를 위해 사적인 정을 버리고 순리에 따랐다. 난 얼마나 불쌍하며 또 얼마나 멋진사람인가 라는 식이죠.
‘읍참마속’이라던가요? 흠, 자기가 희생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기쁨의 눈물이 나오겠죠.”
레베로의 혀는 더이상 자기정당화의 단어를 내놓을 수 없었다. 오명을 감수한다는 따위는 권력자의 잘난 척에 지나지 않음을 명확하게 지적당한 것이다.

— 인상깊은 구절들 —

“간단히 말하면 나는 양을 삼킨 채로 죽은 거야. 양이 깊이 잠들길 기다렸다가 부엌의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맨 거지.
놈은 빠져나갈 여유도 없었어” 라고 쥐는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양은 완전히 나를 지배했을 테니까, 마지막 기회였지.”
쥐는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비볐다.
“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자네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내 기억과 내 자신의 나약함을 지닌 본래의 내 모습으로 말이야.
자네에게 암호 비슷한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지. 자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구원받았나?”
“구원받았지.”
쥐는 조용히 대답했다.

“요는 나약하다는 거야. 모든 것은 거기서 비롯되고 있어. 자네는 그 나약함을 이해할 수 없을걸세”라고 쥐는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지.”
쥐는 “그건 일반론이지”라고 하며 몇 번인가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일반론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사람은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나는 지금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약함이라는 것은 몸 속에서 썪어 가는 거야. 마치 회저병에 걸린 것처럼 말이지, 나는 10대중반부터 줄곧 그것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언제나 초조했지. 자신의 속에서 뭔가가 썪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느낀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자네는 알겠나?”

“그리고 선생님이 죽은 다음에 자네를 이용해서 그 권력 기구를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군.”
“그렇지.”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완전히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관념의 왕국이지. 거기서는 모든 대립이 일체화되는 거야. 그 중에서 나와 양이 있지.”
” 왜 거부했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 위에 소리도 없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무작정 좋은 거야.
자네와 마시는 맥주라든가……”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차의 승객도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를 안심시켰다.
어쨌든 나는 삶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설사 그것이 따분함으로 가득찬 평범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세계인 것이다.

1973년의 핀볼

1973년의 핀볼에 대한 짧은 감상

세계의 끝과 같은 곳에 있는 출구가 없을것 같은 하나의 창고,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수많은 핀볼기계들을 만난다.
소설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이다. 일흔여덟대의 죽음을 갑자기 접하게 되었을때 그는 도대체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는 스리플리퍼스페이스쉽을 나오코만큼이나 다시 찾고 싶어했지만 이내 그곳에서 만난 일흔여덟대의 기계앞에서 죽음과 그로 인한 공포를 느낀다. 그는 수많은 핀볼기계 앞에서 절망한다.
인생이란 그런거야… 돌고 돌다가 어쩌다 아주가끔 핀볼이 마지막 플리퍼의 사이를 마치 농구의 클린슛처럼 깔끔하게 지나면 게임이 오버되듯 그런게 인생이야.
우리는 살기위해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플리퍼를 당기지만 인생에도 시작과 끝은 있는거야…

그는 스리플리퍼스페이스쉽을 ‘그녀’라 부른다. 그따위 기계를 그녀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그로부터 끝없는 상실감과 함께 고독감을 느낀다.
기계는 그냥 기계일뿐이다. 그런 기계를 그녀로 부를정도의 사회를 만들어낸건 과연 누구인가…씁쓸하다.

처음 이소설을 읽기 시작했을때 왜 주인공이나 쥐 모두 핀볼에 집착하는걸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들은 삶이, 흘러가는 시간의 허무함이 슬펐던 것이다.
핀볼은 시작과 끝이 명료하다. 인생이란 핀볼이다.
삶은 돌고 돈다. 그리고 그 끝은 있을듯 없을 듯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구나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모든것의 결말은 똑같고 결국은 허무함만이 남는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쥐는 말한다.
“나는 잠자코 고분을 바라보면서 수면을 가르는 바람소리에 귀를 귀울였어.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을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아니, 기분 같은 게 아니었다구. 마치 뭔가에 푹 감싸인듯한 감각이었어. 그러니까 매미나 개구리, 거미나 바람,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우주를 흘러가는 거지.”

‘1973년의 핀볼’에서의 쥐의 일상을 보자.
쥐는 조용한 오후 시간을 등나무 의자 위에서 보냈다. 멍하니 눈을 감고 있으면 완만한 물의 흐름처럼 시간이 그의 몸을 꿰뚫고 빠져 나가는 걸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씩 며칠씩 몇주일씩 쥐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쥐는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바람의 본질단위까지 내려가본다면 바람은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바람이란 그저 잠시 나의 곁에 왔다가 알수 없는 어딘가로 흘러가버리기 마련이다. 거기서 느낄 수 있는건 끝없는 허무함뿐이다. 그렇게 쥐는 썪어간다

. 그는 자신이 썪어가는것을 느끼지만, 또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도 여전히 썪어갈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견딜 수 없어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핀볼에 출구따위란 없듯이 인생에도 출구란 없다. 그걸 그도 알고 있다. 그걸 알고도 그는 끝없이 침몰되어 갈 뿐이다.

아파트의 싱크대 밑에 쥐덫을 놨던 적이 있다. 미끼로는 껌을 썼다.
온 방안을 뒤진 끝에 먹을 거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껌말고는 찾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 코트 주머니에서 극장 입장권 반 조각과 함께 껌을 찾아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작은 쥐가 그 덫에 걸려 있었다.
런던의 면세점에 쌓여 있던 캐시미어 스웨터 같은 색깔의 아직은 어린 쥐였다.
사람으로 치면 열다섯이나 열여섯 정도일 것이다. 안타까운 나이다.
껌 한 조각이 발 밑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잡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뒷발을 덫에 끼인 채 쥐는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죽어 있었다. 그 쥐의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모든것에는 입구와 출구,시작과 끝이 있어야 된다고 그는 믿는다.
인생은 허무하지만 그로 인해 인생은 어쩌면 아름답다. 어쩌면 그가 수명을 다한 배전반에게 장례식을 치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더불어 ‘1973년의 핀볼’은 각각의 단어나 문장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인간의 내면이나 사물에 대한 묘사는 가끔씩 놀랄정도로 자세히 묘사한다.
언제나 그는 알듯말듯하게 책의 제목을 정하지만 그 제목안에는 모든 주제가 함축되어 있으며 이는 가장 최근작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바람의 노래를 들어보자. 그리고 핀볼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