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잡생각

#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는 명성만큼 대단한 재미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뭔가 물렁하단 느낌이랄까… 소설에 비해 영화는 꽤 괜찮았지만 히로인이 진혜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영화를 한번만 봤다. 미스캐스팅도 이만한 미스캐스팅이 없다. 연기는 그저 그랬지만 왠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오이’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히로인 ‘타케노우치 유타카’는 연기도 외모도 꽤 어울렸다. 그래서 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을까? 그에 비해 사운드 트랙은 꽤 열심히 들었고 요즘도 가끔씩 듣곤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잘된 부분은 역시 OST다. 아넷베닝이 나왔던 ‘love affair’ 이후로 OST를 이렇게 주의깊게 들어본 적은 없다.

# 기타노 다케시의 ‘kids return’의 백미는 역시 엔딩이다. 그들은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돌다가 말한다. “마쨩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리고 ‘히사이시조’의 음악이 들려온다.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강요하고 강요받는 것이 싫다고 한다. 물론 나도 싫다.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강요받는 것은 내용을 떠나 일단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출세를 강요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돈을 강요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자신만을 사랑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 ‘강요’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자신은 바로 성인군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이것저것을 강요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세상은 굴러간다.

# 쇼팽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선율도 복잡하기 때문에 쉽게 질리지가 않는다(솔직히 말해 이해를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소나타를 들을때의 기분에 따라 슬프기도 혹은 즐겁기도 하다. 일반적인 가사가 붙은 음악은 분위기와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쉽게 질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연주곡의 해석은 내맘대로다. 어쨌든 나는 어떤 음악을 듣고 슬퍼해야 한다, 즐거워 해야 한다라고 확정짓는 것보다는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곡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쇼팽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는 것이다.

10월에 읽었던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송시열은 효종~숙종대에 대로(大老)라 불리던 노론 최대 영수였지만 이황과 이이에 비해 지금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효종과의 군신관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말로만 북벌을 외친 전형적인 탁상논리자다. 이이의 학풍을 계승했다면서도 십만양병이나 대공수미를 주장하며 백성을 위했고 서인과 동인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이와는 달리 사대부들의 이익, 아니 더 자세히 말하면 노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서인과 남인과의 명분뿐인 싸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단서를 제공한게 다 그다. 그는 학문은 깊었으나 융통성이 없기에 성리학 이외의 모든 논리와 학문을 무시했다. 효종과 현종은 다 그와 싸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서했지만 결국 송시열은 숙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공자는 ‘군자는 두루 사귀어 편벽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벽하며 두루 통하지 못한다.’라 말했지만 그는 편벽하여 두루 통하지 못했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자신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거늘 선생님은 남 꾸짖는데 맹렬한 것을 굳센 것으로 알며,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거늘 선생님은 권세로써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센것으로 아니 이것이 어찌 합당한 노릇이겠습니까” 노론이 그토록 치켜세우던 송시열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에게서 현대정치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책.

달콤한 나의 도시 – 그동안 한국소설은 일본소설에 비해 섬세한 면에서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보고 그런 생각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정이현’이라는 작가를 알게 해 준 소설. 현실에서 정말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들을 정말 상큼하고 심플하지만 과감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2-30대의 취향과 생각을 꽤 열심히 연구했거나 아니면 작가자신이 굉장히 free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무리 부분은 약간 삼류드라마 분위기가 나기에 실망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즐겁게 읽었던 소설. 영화화된다니 그것도 기대된다.

그 후 – 제목이 일본어로 ‘소레카라’ 한국어로는 대충 ‘그후’. 같은 시기에 보았던 ‘도련님’에 비해 나쓰메 소세키 주류소설의 분위기를 띄는 진지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정신세계에 대한 깊이있는 표현은 소세키의 전매특허다. 러일전쟁 시절의 부유층 자제였던 다이스케의 정신세계와 그의 사랑에 대한 표현은 꽤 감각적이었다. 다이스케는 자신이 백수여야 하는 이유를 아전인수격으로 설명하지만 그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이덕일의 역사서에 워낙 재미가 들려서 이 책도 표지만 보고 그냥 빌려봤다. 근데 생각보단 별로였다. 책의 두께에 비해 소개하는 유물의 수가 엄청나다는 것부터 약간 불안했는데 역시나 유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것도 아니고 너무 단편적이었으며, 유물의 내력에 대한 뚜렷한 논리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시도는 좋았지만 기존의 이덕일 역사서에 비하면 내용이 너무 부실했다.

Go! – 그동안 이 책을 이미 봤는지 알고 있었다. 영화를 봤던 기억은 확실하게 나는데 가네시로 가즈키의 다른 소설과 이미지가 겹쳤던 것인지 봤다고 느꼈다가 혹시나 해서 책을 펼쳐봤는데 역시 안봤었다. 소설은 크게 영화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영화를 이미 봤기에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가즈키의 자전적인 부분이 들어가기도 한 이 책은 재일교포 3세 소년의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만 쿨하게 그려낸다. 사실 가즈키의 문체는 일단 읽기 편해서 좋다. 비비 꼬지 않고 직설적이다. 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거칠것이 없어라 : 김종서 평전 – 난 이 책을 읽기전까지 김종서가 무관인줄 알았다. 아닌게 아니라 ‘김종서장군’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익숙했으니까… 근데 이 책을 읽고 김종서가 문관이었다는 것을, 단순한 문관이 아니라 세종대에 문관중에서도 이름난 성리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세종이 얼마나 신뢰했는지, 4군6진을 어떻게 개척했는지, 또 수양대군에게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원칙에 충실한 사대부였고 세종,문종,단종과의 군신관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수양대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 시기부터 조선의 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단종은 노산군이 되고 공신들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현재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정말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역사는 가정될 수도 없고 다시 돌아올 수도 없다. 그냥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하지만 왜곡이 지금까지 제대로 수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쉽다. 세조대에 많이 왜곡됐지만 김종서는 진정한 사나이고, 진정 대호였다.

(조선 최대 갑부) 역관 –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이었고, 강자에 의해 씌어졌다. 조선시대의 중인들은 사대부와 농민사이의 계급이었고 조선후기에는 최대갑부로 성장했다. 비록 정조대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서얼들이 잠깐 등용되기는 했지만 중인계급은 언제나 사대부에 밀려 꿈을 가졌으나 이룰 수 없는 한을 지녀야 했다. 이 책은 승자는 아니였으나 조선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중인, 더 자세히 말하면 역관에 대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둘째치고 그동안 크게 다뤄지지 않았던 중인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도련님 – 나쓰메소세키의 중학교교사 시절의 경험이 들어있는 책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제외하고는 다 진지한 문체였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의외의 느낌이 들었다. 일단 이 소설은 재미있고 심플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나쓰메소세키의 다른소설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지만 ‘소세키도 이런 소설을 썼구나’하는 마음으로 편한히 읽을 수 있었다.

공중그네 – 굉장히 웃기고 단순하다고 해서 빌려봤는데 그정도는 아니고 그냥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일본의 엽기 만화주인공을 소설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에피소드의 진행방식은 다 똑같았기에 그다지 기대를 갖게 하지는 않았다. 책의 명성에 비하면 그저 그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