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신아리

이것도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착신아리에서 원한을 가진 건 소녀의 영혼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학대 받아 병을 얻지만 병을 얻은 후부터는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것이다.
그이유는 그녀의 어머니 또한 부모로부터의 학대로 인해 자기 자식을 학대하지만 자신의 자식을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좋은 엄마는 다른사람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동정을 받고,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만족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문하우젠 증후군이라 한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와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증후군으로 인해 그건 불가능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때 죽어 가고 만다.

원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일종의 한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가장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핸드폰’을 이용해 원한을 표출하는데 사용한다.
핸드폰이란건 현대인들에게 필수품처럼 사용되고, 또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핸드폰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기계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진실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숨결을 느껴가며 대화하는 것보다 진실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휴대폰을 통해 마치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원활해진 것 처럼 착각하지만 사실은 예전보다 더욱 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실감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영화에서도 보여주고 있는데 주인공은 그녀의 친구와 전화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화면에서 비춰지는
것은 다른 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관객은 대화 내용에 혼란을 느끼면서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인가 헷갈려 하게 된다.
잠시 후 그녀의 친구를 화면에 보여주지만 이미 통화는 거의 끝난 후이다.
그 영혼은 이런 핸드폰을 통해 일종의 경고를 한것이다.

몇명의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에 흥미를 느낀 TV에서 전화를 받은 주인공의 친구를 생방송으로 중계한다.
이 장면이 또 아주 골 때린다.
TV란 매체는 잔인할 정도로 일방적인 매스미디어이다. 거기에 INTERACTIVE란 없으며 주인공의 친구는 그저 하나의 흥미거리일뿐이다.
영화는 녹화장의 장면과 생방송이 전파되고 있는 시내의 거리를 몇번에 걸쳐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일본의 전국에 생방송으로 보여주지만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별 관심이 없다.
현대인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몇 명의 사람이 죽든 말든 그냥 강건너 구경하 듯 하는 사회가 되어버린것이다.
TV에선 몇명의 주술사나 심령술사등을 부르고 그녀에게 주문을 걸어 그녀를 구하려고(명목상으로는) 한다.
그중의 한사람이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한다. ‘이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예요’
또 그녀에게 주문을 거는 도중에 그녀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혼자구나’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주문을 외워주는데도 ‘나는 혼자구나’ 라고 생각해버리면 이야말로 얼마나 심각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인가?

사람들은 위험한 일이 있을 경우 많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면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그 생각을 간단하게 깨 버린다.
생중계가 진행되는 도중에 그녀는 무엇엔가에 죽음을 당한다. 영화 ‘링’에서 귀신이 TV에서 튀어나오는 장면과 버금갈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이다.

아무튼 영화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난 대충 이런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실 학대를 받은 것은 딸이 아니라 심한 천식을 앓던 딸이 자신의 동생을 학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하우젠 증후군이 있었던 것은 딸의 어머니가 아니라 딸 자신이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의 입에 사탕을 집어넣었던것은 딸이 자신의 동생을 학대하고 난 뒤 사탕을 준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어쩌면 딸과 어머니 모두 문하우젠 증후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줄 게’라는 말로만 그녀를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에서 유미에게 빙의된 미미코(딸)는 병상에 누워있는 야마시타에게 입으로 사탕을 넣어준다.
그녀는 뒤에 칼을 숨기고 있고 그것을 모르는 야마시타는 맛있게 먹는다.
유미(미미코)는 웃는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사람들이 애매한 결말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분명 유미는 죽었지만 야마시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유미가 웃는걸로 봐서 살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야마시타는 유미를 믿었고 맛있게 받아먹었다. 비록 입으로 건네준거지만 말이다.
그리고 유미는 그것을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결말 부분에 죽은 야마시타의 동생이 ‘각각 저마다의 하늘이 있다’
고 말하는 것과 엔딩크레딧에서의 파란 하늘…
각각 저마다의 하늘이 있지만 하늘은 이어져 있지 않은가? 하늘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어떤 장애도 없이 마음대로 흘러다니지 않는가?
경계선 없이 하나로 이루어진 하늘처럼 사람들도 정신적인 소통을 나눌 수는 없는걸까?

내가 공포영화중 최고로 꼽고 있는 ‘링’과 비교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링의 비디오테잎은 휴대폰과
휴대폰의 메모리리스트에서 다음 상대에게 전화가 걸린다는 것은 비디오의 copy개념과
시체를 찾아내고 저주가 풀렸다고 착각하는 것은 우물에서 사다코를 찾아내는것과
사진속의 사람 얼굴이 희미해져 있는것은 링에서의 사진의 그것과
자신의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링에서 사다코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각각 비교된다.

어쩌면 링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같았지만 그것을 휴대폰이라는 친근한 통신기기를 통해 극도의 공포심을 끌어낸 좋은 영화였던 것 같다.
단순한 일회성 공포로 그치지 않고 현대인의 커뮤니케이션 단절과 그 근본이 되는 단계인 가족해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으며 고전적인 방식을 이용한 것이 아닌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 공감할만한 공포를 유발시키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영화를 잘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공포분야만큼은 확실히 잘만든다.
그 폐쇄적인 느낌의 화면구성과 그에 걸맞는 사운드, 왠지모르게 공포영화에서는 기괴스러운 일본어의 억양은 일본영화에서만 느끼는 것들이다. 갑자기 사일런트 힐이 생각난다… 굉장히 이 영화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트랩트

소재와 단순하지 않은 여러사람간의 심리나 상황 묘사는 괜찮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래서 클라이막스라던가 흥미를 끄는 부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저런 방식의 유괴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우려했던 역으로 범인이 인질로 잡힐 가능성과 그 대책에 대한 부분에선 너무 빈약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말고도 영화중후반엔 유괴를 저지를 이유를 말해주는데 그게 참 어이없다. 그런 치밀한 범죄를 구성하면서도 그런 범죄를 저지른 원인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해보지도 않고 ‘복수뿐이다!’ 이래봤자… ‘이 산이 아닌가벼~’ 쯤의 의사전달밖에 안된다.
차라리 ‘그냥 돈이 필요해서…’ 라는 이유로 유괴를 저질렀다면 더 설득력 있을뻔 했다.

이영화엔 몬스터에 나오는 샤를리즈 테론이랑 미국 최고의 귀염둥이 꼬마애 다코타 패닝이 나온다.
이 둘이 나와서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