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lie Nothomb


몇주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쭉 읽어봤다. 하루키나 폴오스터의 소설은 대충 읽어봤고,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작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아멜리 노통브가 한국, 그리고 세계적으로 꽤나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단한 독서가도 아닌 나이기에 그냥 사람들이 추천하는걸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밌어서 한국에서 출판된건 거의 읽어봤다. 소설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못 읽은 책이 몇 권 더 있지만 그건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녀는 ‘이 사람 좀 축복받았구나’ 싶을 정도로 어릴적부터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아버지가 외교관이니 당연하지만),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경험과 지식을 책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노통브의 대단한 점은 그런 경험과 지식을 잘 활용해 제대로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삶에 대한 냉소와 그에 반하는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혐오는 소설속에서 절묘한 비율을 이룬다. 내가 절반이면 적도 절반이다. 인간은 항상 실제든 가상이든 적을 만들어둔다. 수많은 운동선수는 적과 실제로 경기를 하거나 아니면 이미지트레이닝으로 가상의 적과 대결한다. 직업을 가진 이들은 주변의 모든 동료를 적으로 설정한다. 사람이 만든 국가간에는 그 관계가 더 심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적을 만들고 싶어할까. 소설 ‘오후 네시’에서 적은 이웃집 의사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적은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 적은 집의 하인이다. 두려움과 떨림에서도, 머큐리에서도, 앙테크리스타에서도… 끊임없는 동어반복이다. 그렇게까지 노통브가 말하고 싶어하는 적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적이 없으면 흥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일까. 우리가 이웃의 사람들을 ‘타인’으로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적이다.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설정하면 ‘적의 화장법’의 이야기가 된다. 노통브가 말했듯이 언어는 오해의 근원이다. ‘타인’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설정되면 그것은 그가 적이라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타인’이라는 단어에 그런 의미를 둔다. 하지만 타인은 나다. 나는 타인이다. 그리고 나는 나다. 노통브는 항상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토록 알고싶어하는 ‘나’란 무엇일까?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찾으려 한다. 우리 또한 ‘나’를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동어반복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시선은 선택이다. 뭔가를 응시한다는 것은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시야의 나머지 부분은 관심 범위에서 제외하겠다는 뜻이 담기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인 시선은 무엇보다, 거부이다 –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 오후 네 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