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2004.4.25)
죽음과 삶에 대해 또 생각해 본다.
죽음이란 절대로 우리와 무관한것이 아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와 공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그저 enjoyment의 하나일지 모를 수 많은 놀이공원의 ride들도 어쩌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것일지도 모르며, 번지점프 또한 그럴것이라 생각한다.
번지점프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스포츠다. 누군가 번지점프대에 올라갔을때 그는 어쩌면 단순히 추락하는 순간의 아찔한 긴박감만을 느끼기 위해서 올라갔겠지만 한편으로 그의 내면속에서 번지점프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기 위한 도구중 하나일지도 모르며 그로 인해 그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다는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해변의 카프카의 ‘해변(shore)’과도 같은 의미이다.
해변은 땅과 바다의 경계이며 이는 다무라카프카가 건너는 다리와도 같은 의미이다.
그가 다리를 건넌 이유는 자기자신을 찾고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기 위해서였다.
삶과 죽음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해 공포감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또 너무 의식하지 않아서도 안된다. 다무라카프카처럼 성장하기 위해선 언제든 다리를 건널 용기가 있어야 할것이다. 세계는 너무 터프하지만 또 그만큼 근사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죽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거다.
‘해변의 카프카’ 소설 자체는 ‘노르웨이의 숲’의 주제의 어느정도 연장선상에 있는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이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것 같은데 해변의 카프카는 그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의 끝에서 사에키는 다무라카프카에게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한다. 카프카는 현실세계에, 사에키는 異세계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연결되 있는것이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곳저곳을 맘대로 갈 수 있듯이 직접 현실과 異세계를 갈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언제나 그들은 연결되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난 산다는게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내가 말하자, “그림을 쳐다보아라.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하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이제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떳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것이다.”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잠을 잔다는 것(죽음은 현실세계에서 보기엔 영원한 잠일뿐이다)도 다리를 건너는 행위와 상통하며 잠을 자고 일어났을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될수 있다고 말한다. 산다는것에 대한 의미를 찾기위해선 그림을 보며, 즉 해변(삶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바람의 소리를 들어야 된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며 독자 여러분이기도 합니다’ -<해변의 카프카>에 부쳐 독자에게 보내는 메세지
다무라카프카는 다리를 건너 갔다 다시 돌아오며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장 터프한 ‘소년’일수는 있지만 가장 터프한 ‘인간’은 아닌것이다.
하루키는 완전히 완성된 자아가 아닌 결국은 불완전한, 또 산다는것의 의미를 찾기를 원하는 15세의 소년으로써의 다무라카프카의 이야기의 끝을 맺으며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나 자기 자신에게 그 의미를 찾기를 부탁한다.
인상깊은 구절
“꿈속에서 행해진 일에 대해 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결국 그 꿈은 네 영혼의 어두운 통로를 통해서 숨어 들어온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