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 오빠가 돌아왔다, 레벌루션 No.3, 사도세자의 고백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 한두달전에 읽었던 책. 숭산 큰스님의 제자인 현각 스님의 책이다. 전에 읽었던 무량스님의 ‘왜사는가’와 기본적인 이야기 진행방식은 비슷했다. 왜 자신이 삶에 의문을 가지게 됐는지, 어떻게 스님이 됐는지 등등을 늘어 놓은 책이다. 2권짜리 책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반나절도 안되서 다 읽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원을 나와서 그런지 꽤나 달필인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다가 불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예수의 가르침도 존경한다고 한다. 나는 이게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인의 문제점은 너무나 배타적이라는데 있다. 그들의 문제점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는데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을 믿지 말고 진리 자체를 믿으라고 말했다. 진리는 예수나 석가모니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에 쉽게 도달하는 법을 가르쳤을 뿐이다. 하지만 요즘 많은 종교인들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이 전세계적인 종교의 문제점이고 그로 인해 지금도 수많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현각과 같은 종교인이 많아지기를 바랄뿐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 꽤나 예전부터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추천을 받았지만 얼마전에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장편소설인줄 알았는데 단편소설이어서 약간은 김이 빠졌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현상에 대한 예리하고 폭넓은 관찰과 다양한 관점,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소재들이 인상적인 책.

레벌루션 No.3 – 한국에서는 ‘Go’라는 영화와 소설로 유명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첫번째 소설로 아메바, 좀비등으로 불리는 일본 3류 고등학생들이 ‘더 좀비스’를 조직해 벌이는 이야기. 책을 고를때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나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역시나 유쾌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일류여고의 여학생들과 사귀어 유전자 균형을 이루려고 습격을 하기도 하고, 오키나와에 있는 친구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 한달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스토커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그들의 열정은 부럽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3류 추리소설같아 약간 실망.

사도세자의 고백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즉위 일성으로 시작된 정조시대. 정조의 이 말은 아버지의 한과 억울함의 표현이었다. 이 책은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을 비판한다. 한중록이 왜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지 영조실록과 한중록과의 대조등 사료를 통해 입증하며, 또 사도세자가 얼마나 성군 자질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말한다. 사도세자는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노론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영조와 정조 시대는 세종시대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정치를 펼친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였지만 그들은 노론에 자유롭지 못했다.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는 모두 당론의 피해자였다. 그 당시 노론이 아닌 소론이나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권력이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결국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분노하고 답답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책은 국회의원 필독서로 지정해야 된다.

왜 사는가 – 무량 스님 수행기


# 난 어릴적부터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심하면 집의 벨을 누르고 교회 오라고 하는 사람들도 싫었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도 싫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반감으로 불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불교는 심심하면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고, 또 절에 가도 그냥 앉아있다가 절만 몇 번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는 무교인이지만 가끔 불교에 관한 서적을 읽을 때가 있다. 종교적인 관심보다는 순수한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 책은 미국에 불교를 전하고 있는 숭산스님의 제자 무량스님이 쓴 글이다. 무량스님은 예일대 재학중에 숭산스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제목처럼 ‘왜 사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 사람들이 왜 사는지, 또 나는 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나이를 먹어가며 이것저것 현실적인 것들에 부딪히면서 점점 왜 사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게 되었다. 말하면 ‘자동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살다 죽을 뿐’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내 삶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 이 책의 저자 무량스님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직접 대답을 해주기 보다는 자신이 왜 ‘왜 사는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됐는지,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 또 어떻게 태고사를 지었는지 이야기하며 ‘왜 사는가’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솔직, 담백한 글은 읽기에도 좋았고, 글솜씨를 떠나 그가 생각하는 사람의 삶,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뭔가 생각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 ‘진리란 어쩌고 저쩌고 하니 너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하기보다는 화두를 던져줌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법, 그것이 불교의 방식이다. 무량스님은 지금도 10년 넘게 태고사라는 절을 짓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자기 수행이다. 또한 그것은 그 절을 이용할 다른 사람과 후세를 위한 헌신이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자세로 ‘다만 할 뿐’이다.

http://www.mountainspiritcen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