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부터 9월까지 읽었던 책


연애시대 – 영화가 재밌으면 원작이 궁금하듯, 드라마가 재밌어서 원작을 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연애시대는 일본작가의 소설이다. 특별히 일본작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한국작가가 이런 좋은 소설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아직 한국에서 감정표현이 이정도로 섬세하고 구성이 아기자기하고 치밀한 소설은 보지 못했다. 작가 ‘노자와 히사시’는 2004년 44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이렇게 유쾌발랄하고 섬세한 소설을 쓴 작가가 자살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자살과는 별도로 소설 ‘연애시대’는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특히 드라마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보는게 좋을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나레이션을 통해 충분히 섬세한 감정표현을 읽을 수 있었지만 글로만 진행되는 소설에서는 개개인의 감정을 훨씬 세세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드라마와 거의 비슷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가끔 드라마의 오리지널적인 요소나 소설만의 오리지널적인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비슷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항상 주인공들이 던킨도넛에서 만나는게 이상했는데 그건 소설상의 설정이었다. 심지어 바나나 머핀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좋은 소설이다.

환상의 책 – 이 소설의 재미는 둘째치고 폴오스터의 치밀한 이야기 구성능력에는 정말 치가 떨릴 정도다. 그는 정말이지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누가 자서전이라고 하면 정말 믿을 정도로 말이다. 폴오스터의 소설읽기는 잠깐 시들했었는데 이 책을 보고 다시금 놀랐다. 정말이지 폴오스터는 보통작가가 아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달의 궁전’보다도 치밀한 면에 있어선 ‘환상의 책’이 한수 위다. 하루키가 항상 이야기하는 ‘그래도 즐겁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주인공 ‘데이비드 짐머’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 – 영정조 시대의 발전과 두 군주의 정치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려니 하고 빌렸는데 그 시대 학자, 정치가와 탕평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별로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다. 책의 문제라기보다는 제목의 문제인 것 같다.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절반정도는 정조시대의 상황과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만들어진 배경등을 설명하고 있고, 절반정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한글로 간추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대왕이 혜경궁과 사도세자의 회갑연을 기념해 화성을 다녀온 8일간의 행사보고서다. 이 책을 만든 한영우 교수님은 대놓고 이책을 보고 요즘 정치인들은 좀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을 보면 공적인 업무의 자세한 기록에 대해 기가 질릴 정도다. 행사에 사용된 음식을 만든 재료까지 일일이 다 적어놓았을 정도니까… 철저한 실명제를 지시했던 정조대왕이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이 책 한권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걸 보면서 느낀거지만 정말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조대왕이 20년만 더 살았더라면…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 삼봉 정도전으로 시작해 단재 신채호까지 조선시대 대표적 선비들을 간략히 소개해둔 책. 스무명이 넘는 선비를 소개한 책인만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기에 대표적인 선비들을 쭈욱 훓어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후진적이었던 시대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사랑은 그 시절 선비들이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 혹은 자기자신도 생각하지 못하는 시대이기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회의원의 대부분은 친일파의 자손들이고 좀 잘사는 사람들은 친일파가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쓰러져가던 조선말 대부분 양반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다 친일파로 변절했다.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은 대부분의 조선말 선비들에게 개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이회영같은 분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남부럽지 않던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으로 모든것을 버리고 중국땅으로 건너가 독립투쟁을 한 그가 우리에게 낯선것은 그가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라고 작가 이덕일은 말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하고, 고종망명계획을 세우고, 아나키즘으로 전향해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다 일본인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인생을 마친 그가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공산주의 자체는 정말 훌륭한 이론이다’라는 말을 철저히 반박한다. 현실에 적용했을때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훌륭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억압당하지 않으리라’라는 말에서 아나키스트의 기본정신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썼던 아나키스트들처럼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것도 필연적 이유에서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아나키즘과 이회영에 대해 무지했던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이루고자 했던 광복은 이미 오래전일이지만 과연 우리는 그분들의 피와 땀을 잊지 않고 있는가? 부끄럽다. 정말로.

정조대왕의 꿈 – 정조대왕의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좀 더 잘 알수 있었던 책이다. 그가 탕평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말기에 외척을 통한 정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의 끊임없는 고뇌와 후회, 그리고 군신관계에 대한 강요, 현륭원을 드나들때마다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들은 그도 결국 하나의 인간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흔히 조선시대의 왕은 그냥 놀고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조대왕의 생활을 보면 저건 정말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정도로 모든 일에 신경쓰고 고심했으니 그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게 된 것도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조대왕이 바라는 세상은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저세상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와 즐겁게 지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빈치코드 일러스트레이티드 에디션 – 워낙에 베스트셀러라 언젠가는 읽어볼 생각을 했는데 깜빡 잊고 있다가 우연히 읽게 됐다. 배경 사진까지 풍부하게 곁들여져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구성의 치밀함은 그저 그렇지만 기독교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서 그 부분만은 흥미진진했다. 다빈치코드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구라종교인 것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존경하고 따를 의미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창녀로 알고 있던 마리아막달레나가 실은 예수의 아내였다거나, ‘이브’를 통해 교회가 여성의 지위를 의도적으로 추락시켰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인간의 의도적인 조작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부분만 확대,과장해 믿으라고 하면 그건 거기서부터 잘못된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은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그럼으로 인해 후세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난 종교는 안 믿는다.

연애시대중에서
그런 뜻이 아니야, 가이에다. 새롭게 얻는 것보다 잃어버린 쪽이 항상 크게 느껴지는 법이야. 영원히 그럴 거야. 그래서 인간은 까다로운 존재인가 봐. 둘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란 앨범을 넘기는 일이 아니야. 둘이서 옛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좀더 즐거운 일이 앞으로도 많이 일어날 거라고 꿈꾸는 일이야. 그래서…… 필요한 거야, 하얀 캔버스 같은 인생이. 그것을 가져다 줄 깨끗한 남자가

환상의 책중에서
만일 내가 삶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 삶을 파멸시키기 일보직전까지 가야 한다

Amelie Nothomb


몇주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쭉 읽어봤다. 하루키나 폴오스터의 소설은 대충 읽어봤고,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작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아멜리 노통브가 한국, 그리고 세계적으로 꽤나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단한 독서가도 아닌 나이기에 그냥 사람들이 추천하는걸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밌어서 한국에서 출판된건 거의 읽어봤다. 소설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못 읽은 책이 몇 권 더 있지만 그건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녀는 ‘이 사람 좀 축복받았구나’ 싶을 정도로 어릴적부터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아버지가 외교관이니 당연하지만),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경험과 지식을 책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노통브의 대단한 점은 그런 경험과 지식을 잘 활용해 제대로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삶에 대한 냉소와 그에 반하는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혐오는 소설속에서 절묘한 비율을 이룬다. 내가 절반이면 적도 절반이다. 인간은 항상 실제든 가상이든 적을 만들어둔다. 수많은 운동선수는 적과 실제로 경기를 하거나 아니면 이미지트레이닝으로 가상의 적과 대결한다. 직업을 가진 이들은 주변의 모든 동료를 적으로 설정한다. 사람이 만든 국가간에는 그 관계가 더 심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적을 만들고 싶어할까. 소설 ‘오후 네시’에서 적은 이웃집 의사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적은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 적은 집의 하인이다. 두려움과 떨림에서도, 머큐리에서도, 앙테크리스타에서도… 끊임없는 동어반복이다. 그렇게까지 노통브가 말하고 싶어하는 적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적이 없으면 흥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일까. 우리가 이웃의 사람들을 ‘타인’으로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적이다.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설정하면 ‘적의 화장법’의 이야기가 된다. 노통브가 말했듯이 언어는 오해의 근원이다. ‘타인’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설정되면 그것은 그가 적이라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타인’이라는 단어에 그런 의미를 둔다. 하지만 타인은 나다. 나는 타인이다. 그리고 나는 나다. 노통브는 항상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토록 알고싶어하는 ‘나’란 무엇일까?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찾으려 한다. 우리 또한 ‘나’를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동어반복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시선은 선택이다. 뭔가를 응시한다는 것은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시야의 나머지 부분은 관심 범위에서 제외하겠다는 뜻이 담기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인 시선은 무엇보다, 거부이다 –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 오후 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