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재영은 사람과 만나는것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는것이라 생각하며 섹스는 그 일부일뿐이라 생각한다.
재영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뿐, 상대방의 의도와는 다른것이다.
서로간의 소통이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이루어질수는 있지만 서로가 기대하는 것은 다를 수 있고, 그 결과도 같을수는 없다.

재영 행세를 하는 그녀는 재영이 원한것은 돈이 아니었다라고 생각한다.
재영은 상대방과의 소통을 원했고, 그녀는 그래서 그 돈을 다시 재영과 잤던 사람들에게 돌려주려 한다.
재영의 감정을 오해했던 그녀는 그래야만 재영에게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상대방을 위로해주려 한다. 재영이 느꼈던 감정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속물이다.
음악을 한다는 사람은 상대방이 죽든 말든 신경 안쓰고, 중년의 아저씨는 그녀와 관계를 끝낸 뒤에 딸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인한다. 또 다른 사람은 죽을때까지 그녀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말한다.

우연히 딸을 목격한 그의 아버지는 서서히 미쳐간다.
그래서 딸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파괴해간다.
그가 그런 사람을 죽인 어느 화장실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당신의 미소는 보는이의 행복입니다.’
과연 그럴까? 미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람의 감정을 ‘미소’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그 ‘미소’가 가지는 뜻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미소를 짓는것이다.
순수한 미소는 점점 사라져가고 목적을 가진 미소만이 점점 늘어가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것이다.
그녀는 그걸 알지 못했다. 미소란 하나만 있는 줄 알았고 사랑이란것도 하나만 있는 줄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어머니의 산소에 데리고 간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느 한쪽이 죽어도 변색되지 않는것이란걸 알려줌과 동시에 그녀의 어머니가 없기에 딸이 이리 된걸지도 모른다는 자책감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 운전을 통해 바른 길을 가는 법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는 그는 ‘아빠는 이제 안 따라가’ 라고 말한다.
바른 길을 찾아가는 법을 그녀 혼자 배워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고등학생이다.
차는 진흙탕에 바퀴가 빠져버리고 그녀 혼자서는 나갈수가 없다.

그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고 해서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것인가…
돌을 맞아야 하는것은 우리가 아닌가…

길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건 우리가 아닌가…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건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건가…
최소한 자기자신은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까지 같이 끌고 가려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리 심각하지 않게 생각했던(무관심했다는 말이다) 원조교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했다. 김기덕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역시 여기저기에 조금씩 엽기적인 장면을 집어넣었지만 꽤나 이해가 가는 장면들이었다.
음악도 괜찮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상을 받을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와는 관계없지만 여주인공도 예쁘다.

passion of christ

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가 몇번이나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모릅니다’
그건 바로 예수가 멜깁슨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음에 분명하다.
만약 멜깁슨이 예수의 제자중 하나였다면 예수는 멜깁슨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말하니 너는 만인앞에 나를 팔아먹을것이다.’

내가 그저 영화흥행순위에서 수위를 다투는 이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려고 생각했던 것은 중대한 error였다.
영화잡지에는 수많은 비판글들이 있었지만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그 글들을 미처 읽어보지 않았고 그것은 커다란 실수로 지금 나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
멜깁슨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영화를 만드는데 장인정신이 있었더라면 이따위 영화는 안만들었어야 한다.
멜깁슨은 둘중 하나가 부족했던가 아님 둘다 부족했다.

우선 종교적 시선을 제거하고 영화적 재미로써만 이 영화에 접근해보자. (내가 현재 무신론자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적 재미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zero다.
비기독교인으로써 어떠한 재미나 교훈도 얻을 수 없었고 killing time용으로도 매우 부적합했다.(아마 새디스트라면 매우 만족할지도 모른다.)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회상씬은 ‘형식적인’ 혹은 ‘예상가능한’ 대화만을 내뱉으며 영화의 흐름을 끊는데 작정한 듯 했다.
(멜깁슨은 영화의 흐름을 끊고서라도 매우 ‘교훈적인’ 내용을 영화의 구석구석에 배치하고 싶었나보다.)
또 도대체 왜 나오는지 또 뭐하는지도 모를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재수없는 인간은 이게 공포영화가 아닌가 싶을정도로 혐오스럽게 생겨가지고 저인간을 못박고 싶다는(순간적으로 새디스트가 되버린 나) 생각이 간절하게 만들었다.
그 인간은 끝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때 알수없는 그만의 아지트같은 곳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광고의 한장면같은 괴성을 내뱉는데 그인간은 아마 변태인가 보다…
마지막 장면도 압권이었다. 누군가가 터미네이터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냐고 하던데 100%동감이다.
질질 짜고 고통스러워하는 연기만 하던 배우들도 매우 단조로워 보였다. 물론 영화 설정상 그런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일반 종교적인 편견을 접어두고 영화자체만으로 봤을때 이 영화는 3류영화쯤 된다.
3류영화일뿐이라면 그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비기독교인이 봤을때도 이 영화는 예수를 팔아먹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사실의 겉껍데기만은 정말로 사실적으로 핧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겁껍데기일뿐이다. 오렌지의 겉껍데기를 백날 핧는다고 해서 오렌지의 참맛을 알 수는 없는거다.
이 영화의 본질은 그저 새디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대중의 한 개인을 향한 폭력영화일뿐이다.
이 영화의 제작목적은 간단히 말하자면 (감독의 의도)는 아마 예수의 고통을 보여주며 기독교적인 믿음을 더 쌓으라는 것일거다.
근데 이건 뭔가? 그렇게 잔인한 도구들을 가지고(예수에게 매질을 하기전에 도구들을 고르던 장면은 정말…뭐라 할말이 없다.) 예수를 괴롭히는걸, 말뚝을 박고 피가 질질 흐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걸 보며 우리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으니 무한히 감동받으라는건가?
미국인가 어디에서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에 걸려 죽었다는 그사람은 너무 감동을 많이 받아 곧바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향한걸까?
감독은 보이는것만 믿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아직 깨닫지 못헀나보다. 그는 보이는것만 믿기에 성경의 구절만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할꺼라 확신하고 이따위 수박 겉핧기같은 영화를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가 예전에 출연했던 ‘what women wants’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이는것과 들리는것만 믿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나보다.
기독교신자라면 이런 영화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성경이나 읽는게 현명할테고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집에서 드러누워 주말의 명화를 보는게 현명하다.
감독은 영화를 만든 본래 의도(어쩌면 이게 그의 의도일지도)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영화’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에게 ‘끔찍한 기억’을 심어주는데는 분명히 한몫했다.

마지막 12시간이든 마지막 1분이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ps 아.. 잠깐 흥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