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ew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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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도 살인사건
중반정도까지 봤을땐 허접한 영화인줄 알았다. 근데 다보고 나서 인터넷으로 해석을 보고 영화 전체를 곱씹어보니 이건,,,, 잠을 못자겠다. 처음엔 단순히 약물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흥분해서 서로 죽이고 죽은걸로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쓴 해석이 바로 약의 부작용이 인간의 감각을 향상시켜 귀신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건데 내 생각에도 이게 맞는것 같다. 확실한 근거는 박해일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직접 약을 테스트하는데 섬의 다른 주민들은 설탕에 약을 타서 먹었지만 박해일은 빠른 효과를 위해 주사를 맞는다. 물론 효과가 무척 빨랐을 것이고 박해일은 그 시점에서 바로 귀신 소리를 듣는다. 뭔가 재수없는 효과음과 함께 ‘배고파’라는 열녀귀신의 목소리를… 박해일은 열녀귀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두려움도 없을텐데도 귀신소리를 바로 듣게 되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환각작용때문에 귀신을 본게 아니라 귀신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열녀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거사도 몇번씩이나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걸 보니 확실히 그렇다. 모든게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결국엔 다 죽었다. 역시 극장에서 봤어야 했다.

프리즌 브레이크
사람 미치게 만드는 드라마다. 22편인가 하는 시즌1을 3일만에 다 보게 만들다니… 한번 잡으면 도저히 다음편을 안볼수가 없다. 마치 김전일탐정처럼 이야기의 큰 틀은 너무나 뻔하고 주인공이 필요한건 다 나오지만, 곳곳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고, 긴장감이 있고, 쾌감이 있다. 미국 드라마는 어릴때 V나 맥가이버, 소머즈, 전격Z작전같은 것들을 본 뒤 나이들고 본격적으로 본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엔 안든다. 진행은 빠르지 않지만(22회만에 감옥을 탈출하니), 감옥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각각의 캐릭터들이 다 살아있다. 한국드라마는 주요캐릭터 몇명만이 개성적이고 다른 캐릭터들은 진부하고 틀에 박힌 캐릭터가 주를 이루는데 반해 프리즌 브레이크에선 누가 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없을정도로 모든 캐릭터가 다 개성이 있다. ‘아 이런 젠장할 세계최강대국 미국은 한국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드라마를 만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어머니에게 한국은 도저히 이런 드라마를 만들 수 없을꺼라 말하니 너는 애국심이 너무 부족하단다. 동감이다. 그래도 인정할껀 인정해야지. 앞으로 10년안에 한국은 이런 드라마를 못만들꺼다. 스케일뿐만 아니라 감각까지도 너무 뒤쳐져 있다. 요즘 가끔 스쳐가면서 한국드라마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진다. 한달뒤엔가 시작된다는 ‘이산-정조대왕’은 좀 한국적이면서 치밀한 이야기 전개와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보여줬으면…

에반겔리온 신극장판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중학교시절 우연히 접했던 사진한장. 지금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는 애니라는 친구의 설명과 함께… 애니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애니메이션은 에반겔리온이었다. 난 처음부터 너무 차원이 다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그때부터 내 기준은 에반겔리온보다 더 대단한 애니인가, 아닌가로 나뉘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에반겔리온이, 이미 극장판이 2개나 나왔고, 처음 제작된지 10년도 훨씬 지난 그 에반겔리온의 신극장판이 올 여름에 일본에서 개봉한다고 한다. 에반겔리온이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 극장판 데스앤리버스는 엄청난 욕을 먹었고, 다시 앤드오브에바라는 극장판이 나왔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 팬들의 성에 안차기는 마찬가지였다. 뭔가 좀 더 확실히 끝을 내줬으면 했다. 이번 극장판이 그런 바람을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개봉 자체는 환영이다. 어서 빨리 보고 싶다.

바벨, 데자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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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바벨탑 [Tower of Babel]
인류역사의 초기, 즉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시날(바빌로니아)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탑 건축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을 쌓아올려 자기들의 이름을 떨치고 홍수와 같은 야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신 야훼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물로써 대심판을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의 표징이 무지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야훼를 불신하는 상징으로 바벨탑을 세운 것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시켜 멀리 흩어지게 함으로써 탑 건축이 중단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지명을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그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창세 11:9)는 내용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제목이 바벨인지 알고 싶었다. 바벨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언어를 분리됐다는건 지금 알았다. 감독은 이전에 ’21그램’을 제작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다(젠장할, 이름 한번 길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21그램을 매우 인상깊게 봤지만, 참 독특한 시선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영화를 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카모토의 음악이 어디 들어갔나 궁금해서였다. 감독은 개인적으로 사카모토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음악을 꼭 영화에 넣고 싶었다고 한다. 나로써는 오리지널 사운드가 아닌게 아쉽지만…
별로 성실하지 못한 계기로 영화를 보게 됐지만 21그램만큼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은 이전작품처럼 영화를 꼬아놨는데 이번에도 시간은 지멋대로 흘러가고 아무 관련없을것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관련을 맺는다. 결국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하기전에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최소화될 수 있을꺼라는 거였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꽤 긴 런닝타임동안 이 나라, 저나라를 왔다갔다 한다. 영화는 아파트에서 서로를 안고 있는 두 부녀에게서 카메라의 시선이 점점 멀어지면서 수많은 빌딩을 비쳐주며 끝난다. 그 수많은 빌딩,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빛의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구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늘과 점점 가까워지는 그 수많은 빌딩들은 결국 또 하나의 바벨탑인것이다. 감독은 바벨탑으로 인해 인간의 언어는 단절됐고 의사소통은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거겠지. 그래도 역시 힘들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마지막에 쓰인 사카모토의 ‘bibo no aozora’는 마치 그 장면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만큼 인상적이었다.

데자뷰


처음 가본 곳인데 이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느끼거나 처음 하는 일을 전에 똑같은 일을 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주변의 환경이 마치 이전에 경험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 꿈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데자뷰 현상이라고 한다.
이 영화도 그냥 덴젤워싱턴이 나오길래 봤다(역시 성실하지 못한 태도다). 덴젤워싱턴은 가끔 화끈한걸 보여주니까… 이런 복잡한 내용인지는 짐작도 못했다. 공간처럼 시간도 수많은 평행우주로 쪼개진다는 평행우주론에 근거한 영화일줄이야… 인공위성과 음성을 기초로 건물내부의 상황까지 컴퓨터로 만들어낸다는 부분이 좀 구리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봤는데 역시나 구라였다. 영화 ‘빽투더퓨처’에서 과거와 미래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과거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못만나도록 하면 현재의 나는 있을 수 없다는거다. 거기서 영화 빽투더퓨처는 중대한 이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못만나는 상황을 만들게 되고 주인공의 몸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는 부분이 이를 말한다. 이부분은 어렸을때 봤음에도 영 이상했다. 그렇게 주인공이 사라지면 미래의 주인공은 어떻게 과거로 온것인가? 여기서 완전히 막혀버리는 것이다. 뭐 빽투더퓨처에선 다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도록 별 삽질을 다 한끝에 마무리짓기는 하지만… 반면 평행우주론에서는 시간도 공간만큼 존재한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지금 미국에 있을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잠을 자느라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지 못할수도 있다. 그 많은 상황이 각각 별개의 것으로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신이 미리 예정해놓은 것은 없다’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의 행동이라는 변수에 따라 수많은 결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 어찌보면 섬뜩한 이야기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사람들이 재밌다고 하길래 겁나게 기대하고 봤는데 젠장할! 쓰레기다(물론 내 관점에서).
감독이 ‘불량공주 모모코’를 만든 사람인데 사실 그것도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번 작품은 진짜 욕밖에 안나왔다. 이건 코메디인지 진지한 이야긴지 런닝타임 30분이 지나도록 전혀 갈피를 못잡겠고, 마츠코는 진짜 병신이다. 중딩교사 하는 여자가 개념을 밥말아 먹었다. 사춘기도 아니고 그 나이에 가출하는것부터가 웃기지만 ‘나는 사랑이면 다 괜찮아’라고 외치며 병신같은 남자들만 골라잡아 학대받는걸 보면 정말 자학이라고밖에는 안보인다. 아니 이런 70년대 스토리에 열광하는 이유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요즘 초딩들도 이런 스토리 보면 짜증난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받는 사람은 ‘후레쉬맨’을 보고도 감동받을 수 있다. 진짜다. 유일하게 좋았던건 영상미와 음악 부분이다. 마츠코의 연기가 좋았다고들 하지만 솔직히 캐릭터 자체가 너무 혐오스러웠고 다른 캐릭터들은 오버연기 일색이었다. 제목 하나는 잘 지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