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christmas in the ccc

오늘은 군대에서 맞는 마지막 크리스마스다.
2002년 군대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맞은 이래 횟수로는 3번째다.
난 비기독교인이고 크리스마스에도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크리스마스라고 해봐야 별다른 느낌은 없다.
하지만 2004년 크리스마스가 왔다는것은 제대가 30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그점에서는 좋다. 오늘은 휴일이고 당직을 서는 날이기에 꽤 느긋하게 보냈다.
10편 중 마지막 2편 남은 band of brothers를 다 보았고 아침엔 영화 ‘윔블던’을 보았고 저녁땐 ‘퀼’을 봤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다 봤다.
그리고 후임들과 스타크래프트를 몇판 즐겼다.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군대에서 이정도라도 했다는건 그나마 다행이다.
내무대에 있었다간 하루종일 후임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며 티비를 보든가 잠을 자든가 했을 것이다(정말이지 군대에선 할일이 없다).

이제 제대가 30일도 안남은 시점에서 그동안 뭘했는가 생각해보면 한심해지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군대오기 전보다는 성숙해진 점이 있으므로 글로 써도 될 것 같다.
전공분야에선 유닉스를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군대 오기전 그다지 하지 않았던 독서도 나름대로는 했다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팬이 되어 그의 작품을 거의 읽었고, 요시모토 바나나도 알게 됐다. 박완서는 이문열보다 좋아하게 됐고, 그 외에도 여러 작가를 알게 됐다.
물론 아직 시작이다. 독서는 평생의 친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볼 책이 많고 볼 책을 적어둔 리스트를 볼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군대 오기 전 가끔 찍었던 사진은 이곳의 특수성으로 인해 거의 즐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에 ‘사진’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보게 된 점은 소득이라 할 만하다.
또 800일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인내’라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지게 되었고, 일찍 일어나게 된 습관도 예전 생활보다 나아진 점이다.

물론 이런것을 성숙이라 부르기에는 약간 묘한 감이 있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게으르고, 사물에 무관심하며,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다.
재미있는 것이라면 ‘해야될 것’보다도 먼저 하는 건 여전하고, 하기 싫을때 ‘해야될 것’을 미련없이 그만두는 것도 여전하다.

군대가 나를 바꾼 것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긴 하지만 내가 정말 바뀌려면 내 의지에 의해 바뀌어야 한다.
내 의지는 나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고 내가 나의 의지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변화란 일어날 수 없다.

folding a paper

지금 후임들은 종이접기가 한창이다.
장미를 수십개씩 접어 그걸로 I♥U 따위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각의 장미도 멋지지만 그것들로 이루어진 문장을 보면 정말 멋지다.
그것들에 들인 시간이 고스란히 베어있는듯 한 화려한 장미들을 보면 과연 ‘여자가 받으면 감동받을만도 하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학교 시절 한 영어 선생님이 있었다.
늙었음에도 상당한 열정과 괴팍함으로 나를 비롯한 수많은 철없고 공부하기 싫어하던 학생들을 괴롭히던 그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려는 듯한 말투로 일관하던 선생님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당히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가 싫었다.
영어 질문에 잘못된 답변을 했다고 ‘러시아로 가라’ 라는 농담조의 소리를 듣기도 했고, F발음을 제대로 못한다고 그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개인 교습 비슷한 걸 받기도 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어느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여중생이 학을 접어 큰 병에 담아 자신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는 그것을 받지 않고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웃기다. 사람은 그런것 따위로 상대방의 행운을 바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노력을 통해서만 어떤 결과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런 행운을 바라는 것은 요행이라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학이 그에게 부담을 주었을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난 그런 행위 자체가 상대방에게 의지를 북돋워주고, 그로 인해 더 많은 행운을 얻었을수도 있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의 영향은 둘째치고 오래시간을 걸려 만든 선물을 거절당했을 그 여중생의 심적고통은 어떠했을까?
그는 그녀에게 무슨 대단한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한걸까? 아니라고 본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해주고 행운을 빌어 줄 필요가 없다. 학을 선물한 것은 행운을 비는 방법중 하나였을뿐이다.

한 사람이 마음이 어떤 형식으로든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되었을때 그들은 기쁨을 느낀다.
그런 교감이 없다면 선물같은건 아무 의미가 없다.